Thursday, April 25, 2013



가마란 무엇인가?

가마는 조그만 집 모양으로 생겨, 그 안에 사람을 태우거나 물건을 싣고 앞뒤에서 둘 또는 넷이 멜빵을 걸어메고 다니는 것이다. 타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출처:위키백과>

사대부 아낙네가 나들이 할 때 타던 가마. 1920년대의 모습.

1. 가마의 유래

가마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신라 기와에 바퀴 달린 연 비슷한 것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전실 서측벽에 있는 〈주인도 主人圖〉와 〈부인도 婦人圖〉에는 호화로운 가마에 앉아 있는 주인과 부인의 모습이 각각 그려져 있다.
≪고려도경≫에도 채여(采輿)·견여(肩輿) 등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가마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수레나 가마를 타는 데 차등을 두었던 교여지제(轎輿之制)가 있었다.

한편 가마를 타고 대궐의 문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삼정승과 조선 말기의 청나라 공사에 한정되었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2. 가마의 종류

(1) 연


임금이 타던 가마로 덩 비슷한데, 좌우와 앞에 주렴(구슬을 꿰어 만든 발)이 있고, 헝겊을 비늘모양으로 늘이었으며, 두 개의 채가 길게 붙어 있다.


원래 연과 여 (輿)는 구별이 있어, 연은 임금이 타는 것으로 밑에 수레를 달아 말이 끌게 되어 있고, 여는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역시 연은 임금이 타는 것이지만 사람이 메기도 하며, 여는 보통사람이 타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금(金)나라에서 상로(象輅)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왕이 대묘(大廟)에 제사지내러 갈 때 타던 연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연은 옥개(屋蓋)에 붉은 칠을 하고 주홍과 황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둥근 기둥 네 개로 작은 집을 지어 위에 올려 놓고, 사방에 붉은 난간을 달아 겉에는 운룡(雲龍)을 그렸으며, 안에는 운봉(雲鳳)을 그렸다. 또한 처마에도 여러 가지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소련(小輦)·대련(大輦)·평련(平輦) 등이 있다.

불교의식에 사용되던 연은 불보살의 연대(蓮臺)를 상징하여 제작된 것이며, 그 형태는 가마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조선시대에 더욱 다양해진 불교의식과 함께 연의 제작 역시 보편화되었다. 연에는 불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의식에도 활용되어 재자(齋者)가 직접 이를 타고 불세계에 왕생하는 놀이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형태는 연을 들게 되는 손잡이와 연의 몸체와 옥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잡이는 앞뒤 두 개씩 네 개이며, 손잡이 부분은 용을 새겨서 장엄하고, 몸체와 옥개 부분에도 칠보 문양과 함께 아름다운 수실을 드리워 장엄의 내실을 다한다.

상고의 유품은 전혀 없고 다만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및 칠곡 송림사(松林寺)에서 발견된 사리구 형태가 모두 연을 상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이 모두 사리장엄구이기는 하지만, 신라시대 연의 형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늘날 현존하는 연은 거의 조선 후기의 것이며, 또 각부의 장엄 역시 많이 망실되어 완전한 것은 보기 어렵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2) 덩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 연과 비슷하다. 취음으로 덕응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 연과 비슷하다. 취음으로 덕응(德應)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덕응방(德應房)은 일종의 승교인 덩을 맡아보던 사복시(司僕寺)의 일부기관으로, 내사복(內司僕)에 속하여 있으며, 궁중의 공주와 옹주 등이 타는 덩을 맡아 관리하던 곳이다. 그리고 사대부 집에서는 혼인 때 볼 수 있었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3) 가 교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반차도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능행(陵行) 및 열무(閱武) 참관 등 장거리 행차 때에 사용하던 가마로  들채를 앞뒤 두마리 말의 멍에에 매달아 운행하였다. 왕이 탄 가교를 어가(御駕) 혹은 대가(大駕)라 하였고, 행렬의 앞에 예비로 운행하는 빈 가교를 공가교(空駕轎)라 하였다.

옥개(屋蓋)는 모두 아청색(鴉靑色)이었고, 앞뒤에는 용두(龍頭)를 부착하고, 또 옥개의 정상에는 주석으로 연화모양의 장식을 첨가하였다.

운행시에는 황색의 복장을 한 하례(下隷)들이 들채를 잡고 평형을 유지하게 하였는데, 어가는 전후좌우에 2인씩 8인이었고, 왕세자의 가교는 1인씩 4인이었다. 또, 이들을 지휘하여 안전하게 운행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을 가교봉도(駕轎奉導)라고 하였다.

왕비나 모후(母后)의 원거리 행차 때에도 가교가 사용된 예가 있는데,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수원 현륭원 (顯隆園 : 思悼世子의 묘) 행차 때는 왕의 감독하에 특별히 제작되기도 하였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4) 사인교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가마. 멜빵에 장대를 걸어서 어깨에 메게 되어 있다. 민간에서 혼례 때에 신랑·신부가 말을 타고 오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가마를 타고 오고간다.

자동차가 일반화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단위로 두 틀의 가마를 필수적으로 갖추어두고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혼례 때에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하였다. 두 틀의 사인교는 신랑·신부의 것이다. 신랑 것은 장식이 별로 없으나, 신부 것은 채색이나 술 등에서 신랑 것과는 달리 화려하다.

신랑이 가마를 타고 신행길에 오르면, 신랑을 보호하고 가는 상객(上客)도 가마를 탄다. 신부가 우귀(于歸)할 때에도 가마를 타고, 신부의 상객도 가마를 탄다. 이때, 신부의 가마에는 흰 천으로 휘장을 두르고, 뚜껑에는 호랑이의 가죽이나 쓸개를 얹어서 잡귀를 쫓는다.

가마를 메고갈 때에는 네 사람이 서로 발을 맞추어야 하며, 먼 길을 갈 때에는 피로를 덜기 위해 권마성(勸馬聲:발을 맞추기 위해 부르는 노래) 소리를 하고 간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5) 초 헌

두개의 긴 채가 달려 있어 앞뒤에서 사람이 잡아끌고 밀게 되어 있다. 바퀴는 쇠로 덧입혀 튼튼하게 강도를 주었고, 줏대 등은 물푸레나무나 참나무 등과 같은 단단한 목재를 이용하였고, 그 위에 쇠힘줄을 어교나 아교풀로 부착하여 강도와 탄력을 주었다.

의자는 사슴가죽으로 등받이와 방석을 만들고, 맨 앞부분과 의자 바로 뒤쪽에 가로대를 꿰어놓아 이것을 잡아 끌고 미는 장치가 되도록 하였으며, 맨 뒤쪽에서는 줏대를 잡고 보조를 맞추도록 되어 있다.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 정도가 한조를 이루어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옛날 초헌을 사용하는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인 당상관댁은 솟을대문에 문턱이 없이 설계되어, 초헌을 바로 밀고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초헌은 사용자에 따라 궁중용은 주칠을 하였고, 사대부의 것은 검은칠을 하였으며, 크기에도 차이가 있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초헌 탄 모습.
조선시대의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출처:네이트백과사전>

(6) 남녀(籃輿)

남여는 뚜껑을 덮지 않는 형태의 작은 가마이며, 주로 고위관리나 그 정실부인들이 타고 다녔다. 덮개가 없어 우천시에는 사용이 불가했으며, 산길이나 골짜기 등 좁은 길을 갈 때 사용하였다. 하인 2명이 앞뒤에서 메고 갈 수 있도록 긴 나무를 이어놓았다.<출처:위키백과>


의자 비슷한 것의 밑에 2개의 약간 긴 채를 꿰어 붙인,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이다.<출처:네이버 백과사전>

(7) 삿갓가마(草轎)

초상중에 상제가 타는 가마. 초교(草轎)라고도 한다. 가마의 가장자리에 흰 휘장을 두르고, 위에 큰 삿갓을 덮은 것처럼 꾸몄다. 옛날 대갓집에서는 초상이 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삿갓가마를 타고 상여 뒤를 따른다. 상중에 외출을 할 경우도 이것을 타고 나들이를 한다.

이 삿갓가마는 앞뒤 두 사람이 메고 다니게 되어 있다. 대삿갓은 상제가 나들이할 때 쓰는 갓으로, 이는 부모를 여읜 사람은 죄인으로 간주되어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하며, 근신하고 자중한다는 뜻으로 깊숙이 쓰고 다녔다. 삿갓가마도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8) 용정자(龍亭子)

나라의 옥책(玉冊)·금보(金寶) 등 보배를 운반할 때에 사용하던 가마이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9) 채 여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왕실의 물건을 운반하는 기구. 고여와 비슷하게 생겼다. 왕실에 의식이 있을 때 귀중품을 옮기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사면을 아름다운 꽃무늬로 채색하고 들채가 있어 앞뒤 두 사람이 메게 되어 있다.

≪고려도경≫의 채여에 대한 기록에는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渾天儀와 같은데,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무늬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에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에는 비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개의 대〔竿〕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강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10) (가자:架子)

음식물을 나르는 들것. 네모진 큰 상자처럼 두툼하게 짜고 두개의 긴 채를 꿰어 두 사람이 가마를 메듯이 하여 나른다. 산역 등 초상 때에는 음식을 나르는 한편, 묘를 지을 때는 흙을 싣고 다니기도 한다.

급한 환자가 생기면 여기에 태워서 인근 한의원을 찾기도 하고, 추수한 곡물을 운반하는 데도 쓰이므로 가마의 개념보다는 들것의 개념이 강하다. 모양도 수수하여 아무 장식이 없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11) 보 교

정자지붕 비슷하게 가운데가 솟고, 네 귀는 튀어나왔으며, 바닥은 소의 생가죽으로 가로세로로 엮어서 만든 가마.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이 타던 가마의 하나이다.

네 기둥을 세워 사면으로 휘장을 둘렀고, 뚜껑은 쇠가죽을 깔았으며, 2개의 나무 막대기 위에 얹어 고정시켰는데, 바닥과 기둥, 뚜껑을 각각 떼어낼 수 있게 고안되었다. 고려 때의 견여(肩輿)를 장식하여 만든 것으로, 두 사람이 앞 뒤에서 메고 다니며, 출퇴근하는 대관들은 물론 그 자녀가 타고 다니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출처:네이트백과사전>

(12) 장독교(帳獨轎)


뒷부분 전체가 벽이고 양옆에는 창을 냈으며, 앞쪽에는 들창처럼 버티게 된 문이 있고, 뚜껑은 지붕처럼 둥그스름하게 마루가 지고 네 귀가 추녀처럼 되었으며, 바탕의 바닥은 살을 대었는데, 전체가 붙박이로 되어 있다. 사람이 없을 때는 소 등에 올려서 고정을 하고, 한 사람이 뒤채를 잡고 조정하며 간다.

가마를 메고 갈 때는 권마성(勸馬聲) 소리를 한다. 권마성이란 임금이 말이나 가교를 타고 거동할 때나 봉명관(奉命官)·수령 및 그들의 부인이 쌍교(雙轎)를 타고 행차할 때, 위세를 더하기 위하여 앞에서 하졸들이 목청을 가늘고 길게 빼어 부르던 소리이다. 임금이 거동할 때에는 사복(司僕)·하인들이, 그 밖의 경우에는 역졸들이 불렀다.

민간에서는 가마를 메고 가다가 맞은편에서 낯모르는 가마가 오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마끼리 맞대고 밀어붙이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쪽으로 승화된 것으로, 우리 민속에 가마싸움이라는 놀이가 있다.

팔월 한가위 명절에, 수십명의 학동이 한패가 되어 영기(令旗)·청도기·청룡기·백호기·주작기·형무기 등을 앞세워 양쪽 기수가 앞에 서고, 뒤에서는 가마를 메고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서, 상대편의 가마와 맞부딪쳐 먼저 많이 부순 편이 이기게 된다.

앞에 가는 가마꾼이 “어이야” 하면 뒤에 따르는 사람이 “어이야 네 말 좋다 자랑마라, 내 말 좋다 자랑마라.”라는 노래를 흥겹게 부른다.<출처: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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